생활복지뉴스

한국 장애인태권도 역사

정인태 2008. 4. 14. 08:55

한국 장애인태권도 진행과정

장애 재활과 복지 위해 창립

이상인, truelife@lifebokji.com

등록일: 2008-04-14 오전 2:43:18

 
▲ 정인태 회장 
태권도의 종주국은 대한민국이다. 태권도는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하지만 대한민국 장애인전국체전엔 태권도가 정식종목은 물론 시범종목에도 들어가 있지 못했다. 그러니 장애인올림픽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이러던 때 한국의 정인태 회장(현, 한국장애인태권도학회 회장)는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을 최초로 제안하고 협회 창립추진위원장이 돼 창립을 주도했다.

정인태 회장은 2006년 11월 9일 KBS에 라디오 ‘유지인의 음악편지’에 출연하여 아래와 같은 칼럼들을 발표했다.


장애인태권도는 희망이다!

정인태

배형진 군의 마라톤 이야기!
김진호 군의 수영 이야기!

태권도를 미치도록 좋아했던 저는 문득 왜 태권도 장애인 스타는 없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올림픽에 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태권도종주국인 우리나라에서 장애인태권도대회 조차 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게다가 태권도장에서 사범이 정신지체 장애인이 잘 못한다고 때려서 죽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교육대학교 재학 시절에도, 국립초등학교 정교사로 재직했던 시절에도 제게 있어 태권도는 늘 함께 했던 친구였습니다. 학교 교사 시절 학교의 제도적 한계로 인해 장애아동을 위한 제 생각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장애아동을 위해 뜻있게 살겠노라 아내와 함께 학교 교사 사표를 내고 사회에 나와 활동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교사의 눈으로 본 장애아동들의 삶과 학교를 나와 세상에서 바라본 장애아동 가족들의 삶은 힘겨움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극히 한정적이었습니다. 발달장애 아동의 발달을 지원하는 아동발달센터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의 발달을 이끌어 보려 애썼습니다. 어떤 아이는 나이는 5세이지만 12개월 정도의 정신발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어떤 아이는 나이는 7세인데 24개월 정도의 정신발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의 발달을 이끌면서 다양한 놀이를 제공해 줬습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무럭무럭 발달이 촉진됐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들한테 최종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 자립하고 세상에서 홀로서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이루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때 배형진 군의 이야기를 담은 ‘말아톤’이 세상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김진호 군의 수영 이야기가 또 다시 세상을 감동시켰습니다.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니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래, 마라톤도 되고 수영도 되잖아. 태권도도 될 수 있어.”

사단법인 장애인태권도 단체 창립추진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함께 했던 교사들과 힘을 모았고 태권도 원로들과 사회복지 원로들한테 제 뜻을 알렸습니다. 의외로 좋은 반응이 솟구쳤고 저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더욱 기뻤던 것은 불의의 사고로 왼쪽 팔을 잃은 한 태권도 사범의 전화였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팔을 잃고 저는 장애인이 됐습니다. 장애인 전국체전에도 태권도 종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꿈꾸는 종목인 태권도가 아닌 육상선수로 활동했습니다. 여기 저기 장애인태권도 대회를 열어 달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기쁘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뜨거운 가슴을 웅켜 잡았습니다. “그래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어. 꼭 이뤄야 해.”

창립추진위원장으로서 이사들을 선임해야 하는 입장에 있던 저는 그 장애인 태권도 사범께 “제가 이 협회를 추진하고 있는 위원장입니다. 우리 협회 이사가 되어 주십시오.” 그 사범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는 후에 장애인 태권도 시범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팔이 없는 장애인이, 말을 못하는 장애인이, 귀가 안 들리는 장애인이, 팔과 다리를 잘 못 움직이는 장애인이, 정신이 지체된 장애인이 태권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을 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꼭, 장애인 올림픽 정식종목에 태권도를 채택시킬 거야.”

속으로 다짐하고 다짐했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장애인도 할 수 있습니다. 다리가 없는 장애인은 휠체어에 앉아 팔로 태권도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한 사범은 누워만 있는 장애인에게 태권도를 지도했다고 합니다. 오직 그가 할 수 있는 활동은 누워서 다리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태권도 격파를 발로 하게 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그 순간만은 행복의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의 미소를 생각해 보면 희망의 살아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열심히 사는 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니다!

칼럼. 정인태

“열심히 사는 장애인은 장애인이 아닙니다.”
“비장애인도 열심히 살지 않는다면 그가 바로 장애인입니다.”

한 장애인태권도 선수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장애인태권도 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큰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저는 대학 학부와 평생교육원에서 주로 유아언어치료, 유아놀이치료, 특수유아체육, 유아태권도 등 유아 관련 과목들을 강의해 왔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엔 한 대학 교양학부에서 태권도 실기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이것도 좋은 기회이자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아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강의 첫 날 맨 뒤에 있던 한 학생이 눈에 띄었습니다. 스포츠머리에 굽은 손에 걸음걸이도 힘겨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은 태권도복을 입고 있었고 당당히 유단자임을 표시하는 검정띠를 매고 있었습니다.

“학생은 태권도를 했었군요?”
“네, 어릴 때부터 장애 재활 목적으로 했습니다.”

그 학생을 배려하면서 조심스레 태권도 지도를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저의 편견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정말 열심히 했고 자신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앞에 나와서 태권도 품새 시범 보일 수 있겠어요?”
제가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네.”
그 학생은 당당했습니다.

선천성 3급 지체장애인인 그 학생은 정말 날 센 모습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발차기며 지르기며 치기며 너무 정확하고 빠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시범이 끝나자 함께 수강하는 학생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습니다. 박수치는 비장애인 학생들의 얼굴엔 대단하다는 놀라움이 가득했습니다.

“태권도를 하면서 신체 움직임이 많이 좋아졌나요?”
“네,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처음엔 장애 재활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국가대표도 되고 싶습니다.”

그의 야심차고 당당한 모습에 저 또한 제 삶을 많이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학기말이 되었는데 그 학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학교를 휴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의 어려운 생활과 사회에서 아르바이트조차 얻기 힘들다는 현실을 얘기 들으면서 마음이 저려 왔습니다. 결국 그 학생은 학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휴학하게 됐습니다. 학기가 끝나고 학생들 성적을 매기면서 두 줄로 그어진 그 학생의 이름을 보면서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 학생의 성적 채점표를 건너뛸 수 없었습니다.

성적표에 A학점을 적으면서 ‘진정한 A학점은 최선은 다한 바로 당신이다’ 외쳤습니다.

며칠 전 제1회 전국장애인태권도대회가 강원도 인제에서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 학생이 겨루기 대회와 품새 대회에 참가하여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또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 빨리 장애인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태권도가 채택되어 희망을 갈구하는 장애인 태권도 선수들한테 환한 미소를 안겨 줬으면 좋겠습니다.


물러섬 없는 용기!

칼럼. 정인태

며칠 전엔 한 장애인 선수한테 겨루기 지도를 하면서 둘이 실제 겨루기를 했습니다. 그 우렁찬 기합과 강한 투지의 몸짓과 심각한 표정에 지도하는 저 또한 압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눈빛은 강렬한 투지에 불타올랐습니다.

“얏, 얏, 얏”

하지만 그 선수의 발은 너무도 느렸고 저의 몸을 가격하지 못했습니다. 발도 높이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제 허벅지 정도에서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섬 없는 탱크처럼 밀고 들어왔습니다.

장애인태권도 대회 때의 일입니다. 이 선수 또한 겨루기 대회에 나갔습니다.

“이제 품새 대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잠시 후 겨루기 대회가 전개될 겁니다. 선수들은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송이 울려 퍼지고 관중들과 협회 초청 손님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인 얼굴들이었습니다. ‘장애인이 태권도 겨루기를 어떻게 할까.’ 뭐 그런 걱정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심판들의 등장과 두 선수가 경기장으로 나왔습니다. 모두들 첫 선수들의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고 그 선수의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렸습니다.

“얏, 얏, 얏”

하지만 발차기와 주먹 지르기 등 느린 모습에 한 쪽에서는 ‘뭐, 이래!’ 하는 반응이었고 한 쪽에서는 우렁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비웃음 섞인 말을 하고 있는 관중에게 다가가 얘기했습니다.

“저 선수는 정신지체 2급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간질장애로 인해 소아마비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 발 조절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습니다.”

그 관중은 제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그 선수를 응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수는 결국 입상하지 못하고 예선에서 떨어졌지만 많은 사람들한테 장애인도 자신 있게 도전한다는 물러섬 없는 용기를 보여줬습니다. 나는 얼마나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왔나 나는 얼마나 나를 극복하면서 살아왔나 생각했습니다. 비장애인 모두도 잠재적 장애인입니다. 언제 어떻게 장애가 될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고 장애인을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으름, 나태, 교만, 시기, 질투, 편견, 차별 이 모두가 또 하나의 장애입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들의 장애와 싸우고 극복해 갈 때 우리 사회는 보다 장애 없는 세상이 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랬다. 정인태 회장은 장애인들한테 목적 있는 삶에 대한 안내를 위해 장애인태권도를 소개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정인태 회장의 노력으로 2006년 4월 2일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창립총회 및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발기인대회로 장애인태권도의 역사의 깃발이 솟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를 2006. 6. 16 사단법인으로 허가했다. 이렇게 하여 공식 장애인태권도의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창립추진위원장,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추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정인태 회장은 태권도 원로가 초대회장을 맡는 것이 발전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고 자신께서 회장을 맡겠다고 몸소 찾아온 진익한 태권도 원로를 초대회장으로 추대했다.

2006년 2월 22일 정인태 회장이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MBPA아동발달센터 교사회의에서 정인태 회장과 교사들은 장애 아동들의 미래와 자립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정인태 회장은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을 제안했고 교사들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과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의 순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MBPA아동발달센터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협회 창립추진위원회가 조직됐고 창립추진이 각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급속도로 장애인태권도협회 창립이 이뤄졌다. 정인태 회장은 행정력의 보완을 위해 전 국회 4급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던 윤진영씨를 사무총장으로 추천했다.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초대 총재로는 전 대전고검장을 역임한 이건개 전 국회의원을 찾아가 직접 총재 수락을 받아냈다. 정인태 회장은 창립총회 당시 상임이사로 선임됐고 이사엔 기업가 겸 발명가인 박갑열 이사, MBC 뽀뽀뽀 MC 출신인 이민욱 이사, 장애인종합복지관 의료재활팀장인 진영숙 이사, 장애인이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태권도장에 수석사범으로 재직했던 한국현 이사가 선임됐다. 홍보대사엔 탤런트 안정훈 연예인이 선임됐고 감사엔 서울디지털평생교육원 전임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이상인 감사와 김정민 감사가 선임됐다. 이렇게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의 창립과 실천은 이뤄졌다.

이후 2006년 6월 17일 장애인태권도선수단 창단식 및 전진대회가 동작구청 구민회관에서 진행됐다. 2006년 4월 20일엔 장애인태권도시범단이 창립되어 장애인태권도를 알리기 위한 작업이 전개됐고 제1회 WTF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개막식에서 장애인태권도시범단의 시범이 전개돼 세계 50여개국이상의 관중들한테 환호의 박수를 받았다. 2006년 11월 4일부터 5일까지는 강원도 인제에서 제1회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장기 전국태권도대회가 열렸다. 이로써 장애인태권도 진흥과 역사의 기틀을 마련하게 됐다. 2007년 3월 18일 국제대회를 대비한 장애인태권도 한국대표 선발전이 의정부 경민대학에서 전개됐다. 이 때 대회장은 국회의원 이경재 의원이 맡아줬다.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와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은 기존 비장애인 태권도협회들과 연계하여 장애인 올림픽 태권도 정식종목 채택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해 왔다. 그 중 정인태 위원장은 장애인올림픽태권도정식종목채택범국민추진연대를 조직하여 장애인올림픽태권도정식종목 채택 홍보를 전개해 왔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장애인태권도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은 한국농아인태권도협의회였다. 농아인들은 다른 장애인들과 비교하였을 때 상대적으로 청각장애와 언어장애 외 신체활동이 자연스러웠기에 장애의 한 영역으로 발전되어 왔고 농아인태권도 대회 등이 전개되기도 했다.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시각장애, 청각장애, 지체장애, 발달장애, 정신지체 등 장애 전 영역에 걸쳐 장애인태권도의 통합과 발전을 꾀하였다.

하지만 처음 전개되는 협회라 갈등과 어려움들이 많았다. 진익한 회장의 강원도 인제 수해로 인해 협회 운영이 어려워졌고 2007년 11월 27일 정인태 회장은 정관에 의거 회장 권한 대행을 맡게 됐다. 이후 2008년 2월 13일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와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제 2대 회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여러 모함과 혼돈으로 회장직을 사퇴하게 됐다. 이후 협회는 잦은 회장 교체가 전개됐고 여러 협회로 분할됐다. 협회의 계속된 분란 속에 정인태 회장은 결국 자신이 최초 창립 제안하고 창립추진위원장으로 창립 완료하고 공들여왔던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직과 세계장애인태권도연맹 회장직에서 사임하고 모든 직책을 사임했다.

이후 정인태 회장은 대한재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여 발달장애인 무료 재활태권도교실을 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 선수들의 계속된 권고로 대한발달장애인태권도협회, 대한장애인태권도총연맹과 세계장애인태권도본부 창립을 추진했고 현재 두 단체를 통해 장애인태권도 발전을 꾀하고 있다.

* 정인태 회장 약력
- 대통령 직속기관 선정 우수 신지식인
- 대통령 자문 헌법기관 자문위원(12기, 13기)
- KBS, MBC, SBS, EBS, CBS TV 다수 방송 출연
- 사단법인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회장 역임
- 서강대학교, 숙명여자대학교, 극동대학교, 한국성서대학교 등 다수의 대학 출강 경력
* 1999년 신지식인 선정【행정자치부 후원, 한국휴먼네트워크 주관, 지역YMCA, 지역참여자치시민연대, 지역 경실련, 지역신문, 시민의 신문사 등 50개 이상의 시민사회단체 협조 하에 전국범위로 선정】
*『MBPA과학』 창시자

생활복지뉴스 이상인 기자(truelife@lifebokji.com)